“성장호르몬은 밤 10시에 나온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속설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를 10시 전에 일찍 재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의 출처와 근거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근거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대체 밤 10시라는 시간은 어떻게 나온 걸까요?
성장호르몬은 첫 깊은 잠에서
성장호르몬 연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봐도 밤 10시라는 특정 시간을 언급한 논문은 찾기 어렵습니다. 생리학 연구에서 밝혀진 바로는 성장호르몬은 잠든 후 첫 서파수면(깊은 수면)에서 집중적으로 분비됩니다.
1988년 Born 연구팀은 한 실험을 했습니다. 피험자들의 수면 시작 시간을 의도적으로 늦춰본 것입니다. 밤 10시에 재운 사람과 밤 12시에 재운 사람의 호르몬 분비를 측정했습니다. 그러자 밤 10시에 잔 사람은 10시 반경, 밤 12시에 잔 사람은 12시 반경에 성장호르몬의 첫 분비가 일어났습니다. 시계 시간이 아니라 잠드는 시간이 기준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장호르몬은 밤 10시에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잠든 시간이 기준점이 되어서 분비된다는 것입니다. 즉 밤 10시 성장호르몬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속설인 것입니다.
밤 10시는 연구실 사정에서 나온 숫자
그렇다면 왜 밤 10시라는 숫자가 튀어나왔을까요?
이 속설의 뿌리는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장호르몬이 수면 중 깊은 잠에서 분비된다”는 사실은 1968년 Takahashi 연구팀과 1969년 Honda 연구팀이 발견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맥락이 빠졌습니다. 바로 연구실에서 피험자들을 재운 시간입니다.
수면 연구에서는 보통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피험자를 재웁니다. 그래야 연구자들이 밤새 관찰하고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으니까요. 잠든 후 1-2시간 뒤에 성장호르몬이 분비되니까, 그래프에서 성장호르몬 피크는 자연스럽게 밤 10시-새벽 2시 사이에 찍혔습니다.
문제는 이 그래프가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습니다. 잠든 후 1-2시간에 분비된다는 핵심은 사라지고 “밤 10시-새벽 2시 분비”라는 시계 시간만 남았습니다.
여기에 당시 생활 패턴도 한몫했습니다. 1960-70년대 동아시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밤 10시-12시 사이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연구 결과가 일상의 경험과 딱 맞아떨어지니 밤 10시에 호르몬이 나온다는 해석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이건 마치 식후 30분에 약 먹기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원래 의도는 밥 먹을 때 약도 챙겨 먹으라는 복약 순응도를 높이기 위한 권고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정확히 식후 30분에 먹어야 효과가 있다는 믿음으로 변했습니다.
성장호르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충분히 재우려면 일찍 재우는 게 좋다는 실용적 권고가 밤 10시에 특별한 호르몬이 나온다는 생리학적 사실로 둔갑했습니다.
거의 50년 전 연구실 조건과 생활 문화에서 비롯된 오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몸은 시계보다 똑똑하다
그렇다면 반드시 10시 전에 잠들 필요는 없다는 걸까요? 흥미로운 연구들이 등장합니다.
주사 시간이 달라도 성장은 같았다
2025년 Levshtein 연구팀은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는 아동 2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아침 주사치료 2주를 진행하고 저녁 주사치료 2주를 진행하며 수면 패턴을 비교했습니다.
수면의 질은 주사 시간대와 상관없이 동일했습니다. 총 수면시간, 수면효율, 야간 각성 횟수에도 모두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사치료가 아침인 날에도 10-12시간 후 약효가 떨어지면 밤이 되면 내인성 GHRH 분비가 증가했습니다. 밤에 자연스러운 성장호르몬 분비가 일어났습니다.
이 연구는 인체의 항상성을 보여줍니다. 아침에 주사를 맞고 저녁에 약효가 떨어져도 우리 뇌는 밤잠 동안 스스로 호르몬을 만들어냅니다. 밤 10시를 놓치고 새벽 2시에 잠들더라도 뇌는 시계와 상관없이 깊은 잠 신호를 감지해 호르몬 밸브를 엽니다.
잠이 부족하면 몸이 압축 모드로 돌입한다
늦게 자거나 잠을 설쳤을 때, 우리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수면 의학의 권위자 반 코터(Eve Van Cauter)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성장호르몬은 잠자는 동안에 무조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잠의 단계(서파수면)에 들어서야 분비됩니다.
그런데 잠이 부족할 때나 늦은 시간에 잠들어 첫 번째 서파수면 시간이 부족해지면, 다음번 수면주기에서 서파수면의 비율을 비약적으로 높입니다. 이것을 수면생리학에서는 서파수면 반동(Slow Wave Sleep Rebound)이라고 말합니다.
평소라면 얕은 잠에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에 깊은 잠으로 바로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수면 시간이 짧아져도, 압축된 깊은 잠 속에서 성장호르몬을 몰아서 분비해 총량을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인체의 신비로운 항상성 유지 기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수면 항상성(Sleep Homeostasis)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은 밤 10시라는 숫자에 갇혀 있는 기계가 아닙니다. 상황에 맞춰 스스로 균형을 맞추는 유연한 유기체입니다.
그렇다면 몇 시에 자든 상관없을까
여기까지 읽으면 그럼 몇 시에 자든 상관없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한계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성장이 달려있는 문제니까요.
첫째, Levshtein 연구에서 아이들의 총 수면시간은 동일했습니다. 아침 주사든 저녁 주사든 약 8시간 반을 잤습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성인의 보상 메커니즘이 영유아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성장판이 열려있는 영유아의 성장호르몬에 대한 민감도는 성인과 다릅니다.
셋째, 현실에서 늦은 취침은 대개 총 수면시간 감소로 이어집니다. 밤 11시에 재워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때문에 아침 7시에는 깨워야 합니다. 즉 8시간밖에 못 자는 겁니다.
2025년 인도네시아의 수면 횡단연구에서 초등학교 2-3학년 아동을 조사한 결과, 불충분한 수면시간과 늦은 취침시간 모두 낮은 신장과 연관되었습니다. 연구팀은 수면 시간뿐 아니라 수면 타이밍도 최적의 성장을 지원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넷째, 코르티솔과의 충돌 가능성도 있습니다. 성장호르몬은 수면 시작에 맞춰 이동하지만 코르티솔의 일주기 리듬은 시계 시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코르티솔은 새벽 3-4시경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기상 직후 최고점에 도달합니다. 이 리듬은 수면 시간을 바꿔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늦게 자면 어떻게 될까요? 아직 수면 전반부인데 코르티솔이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서파수면과 코르티솔 상승 시간대가 가까워지면서 두 호르몬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몇 시에 재워야 할까요
8시든 9시든 ±1시간 정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유연하게 적응합니다. 아이마다 생체시계가 다르고 가정마다 환경이 다릅니다.
하지만 11시, 12시 취침이 습관화되면 주의가 필요합니다. 특히 아침 기상 시간이 고정되어 있다면 총 수면시간이 부족해집니다. 이건 성장호르몬 타이밍보다 더 큰 문제인 수면 부족 문제로 이어집니다.
결국 진짜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 충분한 수면시간 확보
영유아는 12-16시간, 취학 전 아동은 10-13시간, 학령기 아동은 9-12시간 - 일관된 취침 패턴
±30분 이내의 규칙적인 취침 시간
밤 10시라는 숫자에 얽매이기보다는 우리 아이에게 맞는 리듬을 찾아주세요. 50년 전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숫자가 아니라 오늘 우리 아이의 수면을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합니다.
밤 10시라는 숫자에 얽매여 아이와 전쟁을 치르지 마세요. 우리 몸의 성장호르몬은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고 똑똑합니다. 아이가 푹 잘 수만 있다면 조금 늦게 자도 회복의 벽돌은 충실히 쌓입니다.
하지만 늦게 자도 괜찮다는 말이 밤낮이 바뀌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몸에는 성장호르몬처럼 유연한 일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코르티솔처럼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칼같이 움직이는 고집불통 관리자도 있습니다. 유연한 일꾼(성장호르몬)과 고집 센 관리자(코르티솔)의 시간이 엇갈리면 호르몬은 나오는데 몸은 개운하지 않은 엇박자가 시작됩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이들, 키는 크는데 왜 자꾸 짜증을 내고 살이 찔까요? 그 이유는 바로 호르몬의 엇박자에 숨어 있습니다. 이 흥미롭고 중요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아이 몸속의 공사판 이야기로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일단 오늘 밤은 시계를 덮어두고 아이를 편안하게 재우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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