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호주에서 2주를 보냈습니다. 서호주와 한국의 시차는 두 시간뿐이지만 계절은 정반대입니다. 생체시계는 그대로인 채 계절만 겨울에서 여름 한복판으로 바뀐 셈입니다. 새벽 5시부터 이미 한낮처럼 쏟아지는 햇볕이 커튼 틈으로 밀려 들어왔고, 선글래스와 챙 넓은 모자 없이는 거리를 걷기 어려웠습니다.
사흘 만에 평소 수면시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밤 10시면 눈이 저절로 감겼고,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몸이 스스로 깨어났습니다. 오후 서너 시에도 졸음이 몰려와 견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루 종일 강한 햇볕을 쬐는 것만으로도 몸은 그만큼 지쳤습니다.
비행이 아니라 햇볕이 바꾼 잠
시차 두 시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변화입니다. 저를 바꾼 것은 햇볕이었습니다. 아침부터 강한 빛을 쬐면 생체시계가 앞으로 당겨집니다. 저녁 멜라토닌 분비가 일찍 시작되고, 이른 시각부터 졸음이 옵니다. 낮 동안 강한 빛과 더위에 시달린 몸도 그만큼 빨리 지칩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날씨와 빛의 지배를 받는 생물입니다.
오후 6시에 닫는 상점가, 기후가 정한 시간표
몸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생활의 시간표까지 기후에 맞춰 두었습니다. 서호주의 상점가는 오후 6시면 문을 닫았습니다. 저녁 거리는 한산했고, 몇 안 되는 식당가에도 손님이 많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심심한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밤 10시면 잠드는 몸이 되고 보니 다르게 보였습니다. 저녁이 짧은 것이 아니라 모두의 하루가 해와 함께 일찍 시작해 일찍 끝나고 있었습니다.
한낮의 풍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등학생들은 쨍쨍한 해 아래에서 운동장 옆 그늘 정자에 모여 점심 도시락을 먹습니다. 뚜껑을 잘못 닫아 두면 개미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건조한 기후라 미스트를 뿌려 온도를 낮추는 냉방 방식도 문화충격이었습니다. 습도와 싸우는 한국의 여름과는 정반대 해법입니다. 기후가 다르면 몸이 달라지고, 몸이 달라지면 사회가 하루를 배치하는 방식까지 바뀝니다.
영하의 낮잠과 한낮의 시에스타
기후가 생체리듬에 끼치는 영향의 관점으로 세계를 둘러보면, 특이하다고 치부했던 관습들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핀란드 부모는 영하의 겨울날 마당이나 발코니에 유모차를 내놓고 아기를 재웁니다. 우리 눈에는 아동학대로까지 보일 수 있지만, 실측 연구까지 있는 관습입니다. 2010년 Tourula 연구팀이 생후 3개월 아기들의 실외 낮잠 34건과 실내 낮잠 33건에서 피부 온도를 연속 기록했더니 바깥에서 92분 더 오래 잤습니다. 길고 어두운 겨울, 난방으로 덥고 건조한 실내, 차고 신선한 공기가 보약이라는 오랜 믿음이 이 풍습을 만들었습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의 시에스타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냉방이 없던 시절에는 한낮 더위 속에서 일을 계속하기보다 오후 일을 접고 쉬는 편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그 선택이 수백 년 반복되어 사회 전체의 시간표가 되었고, 어른도 낮잠을 자는 사회에서 아기의 낮잠은 가족의 리듬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갔습니다. 서호주의 이른 저녁도, 핀란드의 영하 낮잠도, 지중해의 오후 낮잠도 원리는 같습니다. 기후가 몸을 바꾸고, 몸이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 수면 문제, 문화마다 다른 해석
기후가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잠의 규칙을 정한다면 세계의 아기 수면은 나라마다 크게 달라야 합니다. 2010년 Mindell 연구팀은 17개국 0~36개월 아기의 부모 29,287명에게 같은 설문을 돌렸습니다. 평균 취침 시각은 뉴질랜드가 저녁 7시 27분, 홍콩이 밤 10시 17분으로 약 3시간 벌어졌습니다. 부모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비율은 뉴질랜드 5.8%, 베트남 83.2%였습니다.
그중 가장 눈여겨볼 항목은 부모의 인식이었습니다. 우리 아이 수면에 문제가 있다고 답한 부모가 태국은 11%, 중국은 76%였습니다. 수치상으로 보면 중국 아기들의 수면이 7배 더 나빠야 하겠죠? 그러나 실제 총수면시간은 중국 12.49시간, 태국 12.71시간으로 차이가 13분에 불과했습니다. 같은 수면을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했을 뿐이었습니다.
몇 시에 재울지, 어디서 재울지, 심지어 무엇이 수면 문제인지까지 문화가 정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수면의 기준은 대부분 과학이 아니라 문화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는 기후의 영향을 받습니다.
문화가 정해주지 않는 두 가지
물론 문화마다 다르다고 해서 어떤 모습의 수면이든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먼저 안전입니다. 엎드려 재우지 않고 등을 바닥에 대고 재우기, 잠자리 주변에 푹신한 이불과 베개 두지 않기와 같은 안전 수칙은 어느 문화에서든 똑같이 적용됩니다. 핀란드 부모들도 기온에 맞는 보온과 수시 확인 없이 아기를 밖에 내놓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 아이의 실제 상태입니다. 문화는 무엇을 문제라 부를지 정하지만, 우리 아기가 실제로 충분히 자는지, 낮에 밝게 잘 지내는지까지 대신 답해주지 않습니다. Mindell 연구팀도 아이의 수면은 문화의 잣대가 아니라 그 아이가 겪는 실제 어려움을 기준으로 하나씩 살펴야 한다고 결론에 적었습니다. 재우는 방식은 문화가 정해도, 내 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는 결국 내가 봅니다.
내 방식은 오답이 아니라 여러 답 중 하나
서호주에서 제 취침시간은 사흘 만에 당겨졌습니다. 아기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아기의 생체시계도 아침에 거실로 들어오는 햇볕과 한낮의 바깥 활동에 맞춰 돌아갑니다. 그리고 한국의 여름은 지금 지중해를 닮아가는 중입니다. 폭염과 열대야가 길어질수록 우리가 아이를 재우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부모의 죄책감은 유일한 정답이 있는데 나만 그것을 못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세계를 둘러보면 그 유일한 정답이 애초에 없습니다. 안전을 지키고 우리 아이가 잘 자고 있다면 오늘 밤 재우는 방식도 여러 답 중 하나로 충분합니다. 핀란드의 마당도, 지중해의 오후도, 서호주의 이른 저녁도 각자의 기후에 맞춘 답이었으니까요.
참고문헌
- Tourula, M. et al. (2010). Infants sleeping outdoors in a northern winter climate: skin temperature and duration of sleep. Acta Paediatrica.
- Mindell, J. A., Sadeh, A., Wiegand, B., How, T. H., & Goh, D. Y. T. (2010). Cross-cultural differences in infant and toddler sleep. Sleep Medicine, 11(3), 274-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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